이번호에서는 지구법학회 회장 칼럼과 순천 학술대회 소식을 비롯해, 지구법 관련 논문과 국내외 뉴스를 통해 지구공동체를 향한 법적 전환의 흐름을 함께 조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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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케노시스-법이 물러나는 만큼, 생명이 들어온다.
박태현 지구법학회 회장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2021년 8월,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열린 가톨릭 신학 콘퍼런스에서 ‘생태변환과 기독교 우주론’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우리 시대, 즉 인류세 혹은 신기후 체제에서 구원은 ‘높은 곳으로의 상승주의’가 아니라 ‘아래로의 방향 전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기후 체제와 성육신 사이에 이상한 친근성이 있다. 생태 위기는 성육신이 이미 가리킨 방향을 연장한다. 구원은 낮춤, 케노시스를 향한다.”
‘자기-비움’으로 번역되는 ‘케노시스(Kenosis)’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에서 핵심 개념이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비서 2, 6-7)는 성경 구절은 케노시스 신학의 핵심 본문으로 여겨진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창조주에 대한 의존과 수십억 년에 걸쳐 거주 가능한 세계를 구축해 온 생명체들에 대한 의존 속에서 자기 한계를 드러낸다(김홍중, 「가까스로- 있음: 브뤼노 라투르의 파국의 존재론」, 이음, 2025, 306-7쪽). 인간이 만물 중생의 지배자라는 위치를 버리고 동등한 가이아(Gaia)의 시민으로 스스로 재규정하는 문명적 자기 비움이 요청되며 여기에 인간 구원이 달려있다고 그는 본 것이다. 대학자의 사유는 단순한 학문적 프로젝트를 넘어, 인간 문명의 회심(metanoia)을 요구하는 윤리적·영적 요청으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케노시스적 ‘자기 비움’은 법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까? 법이 자연을 단순히 자원, 재산, 공익, 경관으로만 보는 기존 지각 구조를 유지한다면, 인간은 자연의 권리를 제대로 사유할 수 없다. 법의 케노시스는 법이 자연을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비인간 존재와 연대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다거나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완전히 알 수 없는 타자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존재를 향한 책임과 관심을 지속하는 것이다. 돌고래, 산양, 습지, 강, 숲을 법적으로 사유할 때 우리는 그 존재들의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방식을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환원하지 않고, 계속 듣고, 관찰하고, 대리하고, 보호하는 법적 구조가 필요하다.
법의 케노시스는 자연을 인간과 같은 인격체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법이 인간만을 권리의 중심으로 삼아온 자기 확신을 비워내는 일이다. 인류세의 법은 더 이상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무한히 확장하는 장치일 수 없다. 법은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적 조건, 곧 기후·물·토양·생물다양성·비인간 생명의 존속 가능성을 자기 내부의 한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권리는 인간 권리의 적이 아니라, 인간 권리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조건을 법적으로 가시화하는 장치이다. 법의 케노시스는 바로 그 조건 앞에서 법이 스스로 낮아지고 물러나는 일이며, 그 비워진 자리에서 비인간 존재의 목소리와 미래세대의 삶, 그리고 다른 방식의 좋은 삶이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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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8일, 지구법학회와 강원대 환경법센터, 순천에코컬리지가 함께 생태문명도시 순천에서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도시와 자연의 공존, 생태문명의 개념과 제도화, 그리고 순천의 실천 사례를 중심으로 생태도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좌장인 박태현 지구법학회 회장(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사회로 시작된 제1부 '도시와 자연의 공존: 이론적 모색'을 위한 발제에서 주요섭 순천에코컬리지 주임교수는 그물의 은유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주목하며, 생태문명도시로의 전환은 단일한 정책이 아니라 시민의 실천과 제도,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구성의 힘'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이어진 발제에서 최정호 지구법학회 총무(서강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생태도시의 개념, 법적 정의, 조례 및 정책의 실제 적용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순천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생태도시 조례를 비교하며, 주민 참여, 거버넌스, 그리고 생태도시 정책의 한계와 과제(예: 그린 젠트리피케이션, 기술 도입의 양면성 등)를 짚었습니다.
제2부 '자연과 함께하는 도시 전환: 생태도시'에서 김인철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장은 순천 생태도시는 단기간의 정책 성과가 아니라 조례호수공원과 순천만 보전운동 등 지역사회의 오랜 실천이 축적된 결과임을 강조했습니다. 도시의 문제를 시민 참여와 장기적 비전을 통해 새로운 도시 정체성으로 전환해 온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이어 김동호 순천시청 생태문화팀장은 순천시가 생태문명도시로의 전환을 위해 생태문명 실천 활성화 조례 제정, 전담팀 신설 등 행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에코컬리지 등 시민 주도 교육과 공론장, 플랫폼 구축 등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추진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함태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지구와사람 회원인 김영준 변호사, 박한나 이대 법학연구소 연구원, 송정은 강원대 환경법센터 연구원을 비롯해 성한빛 강원대 환경법센터 연구원과 홍승용 순천에코컬리지 사무국장이 참여해 생태문명도시로의 전환 과정에 대해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참석자들은 이러한 전환이 단순한 정책 추진을 넘어 시민사회와 자연생태계, 제도와 조례, 행정 역량이 오랜 시간 연결되고 축적되며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지속 가능한 실천과 지역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순천의 경험을 통해 생태도시를 넘어 인간과 자연, 시민과 행정, 제도와 실천이 함께 연결되는 생태문명도시의 가능성과 앞으로의 과제를 함께 모색하는 의미 있는 자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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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초, 메이드스톤 의회 ‘자연의 권리 프레임워크' 공식 채택
2026년 4월, 영국 켄트주 메이드스톤 자치구의회(Maidstone Borough Council)가 영국 지방정부 최초로 ‘자연의 권리 프레임워크(The Rights of Nature Framework)'를 공식 채택했습니다. 이 프레임워크의 도입은 2025년 10월 녹색당 소속 스튜어트 제프리(Stuart Jeffery) 의원이 기존의 법적 권한과 거버넌스 구조 안에서 자연의 권리를 실무에 반영할 방안을 의회에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상세한 실무 연구와 법률 자문을 거쳐 자연의 권리 원칙을 행정 체계에 내재화하는 최종 방안이 승인되었으며, 이는 자연을 내재적 가치를 지닌 법적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지방 행정에 전면 수용한 선례로 평가됩니다.
이번에 채택된 프레임워크는 별도의 독립 정책을 신설하는 대신, 의회의 기존 생물다양성 행동계획 및 기후변화 행동계획에 자연의 권리 원칙을 직접 통합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에 따라 메이드스톤 의회는 향후 모든 정책 수립과 사업 추진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태적 이익도 동등한 비중으로 함께 고려하게 됩니다.
실행 단계에서는 서식지 보호와 생태 연결성 강화, 수목 보전, 하천 건강성을 고려한 공간계획 등 이미 진행 중인 조치들을 중심으로 프레임워크가 적용될 예정입니다. 아울러 이행 상황은 매년 정기적으로 점검·보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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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BBC)
영국 최초, 와이강(River Wye) 전 유역 ‘하천 권리 헌장’ 선포
2026년 5월, 영국의 와이강(River Wye) 유역 전체를 아우르는 ‘와이강의 권리 헌장(The River Wye Rights Charter)’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이 헌장은 와이강을 고유한 법적 권리를 가진 ‘살아있는 생태계(living ecosystem)’로 공식 인정한 것으로, 그간 하천 입법을 가로막았던 지방정부별 행정 관할권의 파편화 장벽을 극복하고 발원지부터 해협까지 하천 전 구간을 하나의 유기적 주체로 묶어낸 영국 최초의 유역 통합형(All-river) 선례입니다. 와이강이 잉글랜드와 웨일스라는 서로 다른 자치 정부의 행정 구역을 넘나드는 특성을 고려하여, 접경 지역 지방정부들과 시민사회가 국경을 초월한 공동 거버넌스를 구축해 마련했으며 현재 주요 지자체들을 시작으로 채택 및 효력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해당 헌장은 와이강에 ▲자연적 기능을 수행하며 흐를 권리 ▲생물다양성을 유지할 권리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건강한 유역의 지원을 받을 권리 ▲회복·재생할 권리 ▲법적으로 대변될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실무적 장치로 2025년부터 생태학자 루이스 보드너(Lewis Bodner)가 ‘와이강의 목소리(Voice of the Wye)’라는 일종의 법정 후견인으로 임명되어 유역 관리기구에서 강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번 헌장은 최근 산업형 양계 확대와 하수 유출로 심각한 생태 마비를 겪어온 와이강의 회복을 위한 새로운 지구법학적 거버넌스 모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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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서, 「The rise of Rights of Nature movement and its political implications in Ireland and beyond」
지구와사람 회원인 황준서 성공회대 사회융합학부 사회학 조교수의 논문 「The rise of Rights of Nature movement and its political implications in Ireland and beyond(자연의 권리 확산이 아일랜드와 그 너머의 사회에 주는 정치적 시사점)」이 『Human Geography』 (2026년 4월 발간)에 게재되었습니다.
[국문요약]
전 지구적 환경 위기의 심화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공고히 만들어온 사법체제를 개혁하려는 ‘자연의 권리(Rights of Nature)’ 옹호 운동이 탄력을 받고 있다. 이 운동은 자연을 단순한 착취의 대상인 ‘자원’으로 상품화하는 관습과 결별하고, 인간과 생태계 사이의 보다 균형 잡힌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하며, 권리 옹호자들은 이를 정치적·법적 혁명의 필수 요소로 간주한다. 에콰도르, 볼리비아, 뉴질랜드와 같이 선주민 권리 운동이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성공적으로 옹호해 온 국가에서는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남부 및 북부 모두)의 경우, 자연의 권리 운동은 선주민 운동 맥락에서 등장하기보다 외부로부터 전파과정을 거쳐 등장했다. 자신을 ‘환경 수호인’으로 규정하는 아일랜드의 활동가들은 이러한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결집하고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일부 지방 의회가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발의안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스페린 산맥’에서 금광 채굴과 같은 이른바 ‘녹색 추출주의’ 사업들을 강행하려 한다. 이러한 모순은 자연의 권리가 단순히 법적 인정을 넘어서,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적 참여를 보장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 이 논문은 북아일랜드 내 자연의 권리 운동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 함의를 탐구하며, 관련 환경계획 사업들과 자연의 권리 결의 통과 이후 정치적 상황을 분석한다. 또한 환경수호인들이 자연의 권리를 채굴반대 투쟁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환경법 및 거버넌스에 대한 더 큰 참여를 촉진할 수 있는 보완적이면서 필수적인 도구로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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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환, 「지구법학의 시대: 착취의 법전에서 공존의 현장으로」, 알렙, 26.04.25
- 데이비드 에이브럼, 「감각의 주술: 닿지 않은 채로 이미 닿아 있는 세계에 관하여」, 갈라파고스, 26.05.06
- 필리프 J. 뒤부아,엘리즈 루소, 「새를 관찰할 때 우리는: 탐조 생활이 준 위로와 치유 버드테라피」, 라이팅하우스, 26.05.10
- 베른트 하인리히, 「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월북, 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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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법학회는 "인간은 더 넓은 존재 공동체의 일부분이며, 모든 구성원의 안녕이 전체 지구의 안녕에 의존한다"는 사고에 기반한 법과 인간 거버넌스에 관한 새로운 철학인 지구법학(Earth Jurisprudence)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다. 2015년 출범 이후 학자들과 법조인들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세미나, 컨퍼런스, 연구 출판 등을 통해 지구법학 담론을 형성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2021년에는 한국연구재단 한국학술지인용 색인(KCI)에 학회로 등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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